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터게이트 사건 (문단 편집) ==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== 미국의 일간지 [[워싱턴 포스트]]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(Bob Woodward)와 칼 번스타인(Carl Bernstein)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. 이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계속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밥 우드워드는 이 사람을 '[[딥 스로트|깊은 목구멍(Deep Throat)]]'이라고 칭했다.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그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2005년에야 밝혀지는데, 그 정체는 바로 사건 당시 '''[[FBI]] 부국장'''이었던 윌리엄 마크 펠트(William Mark Felt, 1913 ~ 2008)였다. 펠트와 연락한 사람은 밥 우드워드였는데 둘의 인연이 기이하다. 우드워드가 [[해군]] [[장교]]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펠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. [[조지워싱턴 대학교]] 대학원 동창이었던 둘은 서로 친해졌고 펠트는 이후 우드워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. 장교 제대 후 듣보잡 신문사에 있던 우드워드에게 중앙지로 가라고 조언해준 사람도 펠트였다고. 펠트가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과정은 첩보극을 연상시키게 한다. 우드워드는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[[화분]]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 [[주차장]]에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. 만약 펠트가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[[뉴욕 타임즈]]의 20면에 시계를 그려놓았다고 한다. 우드워드는 이에 대해 펠트가 어떻게 그려놓을 수 있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책에서 언급한 바 있다. 밥 우드워드가 정보를 물어오면 칼 번스타인이 주로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. 종종 우드워드가 펠트한테 확인을 받기도 했다.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이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의 신참 기자에서 일약 전 미국인이 아는 대기자가 되었다. 이 2명은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내었다. 이런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한 장기간의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고 있던 미국 신문, 방송에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[* 간단히 말해 [[황우석]]의 사기극을 까발린 [[MBC]] [[PD수첩]]이나 [[삼성 X파일 사건]]을 폭로했던 MBC의 [[이상호(기자)|이상호]] 기자, [[삼성그룹]]의 [[비자금]]을 폭로했던 [[시사in]] [[주진우(1973)|주진우]] 기자 등을 떠올리면 된다.]이 생기기 시작했다. 또한 여기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, 펠트 이외에도 당시 [[워싱턴 포스트]] 편집국장이었던 벤저민 크라운실드 브래들리(Benjamin Crowninshield Bradlee, 1921 ~ 2014)[* 2014년 10월 21일 별세, 언론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'대통령 자유메달'을 주었다. 별세한 날 오바마 대통령은 "브래들리에게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였다"며 "진정한 언론인이었던 브래들리는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 가운데 하나로 변신시켰다"고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.[[http://www.asiae.co.kr/news/view.htm?idxno=2014102308493321467|#]] 여담이지만, 워터게이트 당시 20대였던 벤자민 브래들리의 아들 또한 언론인의 길을 가게 되고, 이후 [[스포트라이트(영화)|영화화]] 까지 되는 [[가톨릭 아동 성범죄 논란|엄청난 특종]]의 주역 중 한명이 된다. 펜타곤 페이퍼를 다룬 2017년에 개봉한 영화 [[더 포스트]]에서는 [[톰 행크스]]가 역을 맡았다.]와 사주였던 캐서린 마이어 그레이엄(Katharine Meyer Graham, 1917 ~ 2001)[* 영화 [[더 포스트]]에서는 [[메릴 스트립]]이 역할을 맡았다.]도 큰 역할을 했다. 브래들리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으며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고 두 기자를 보호하며 외풍에 맞섰다. 더군다나 이전에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의 가족들을 취재하면서 무단침입(...)을 통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해서 닉슨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고,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진실을 담은 [[펜타곤 페이퍼|펜타곤 보고서]]를 뉴욕 타임즈와 함께 보도하여 닉슨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는 백악관에 절대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닉슨 행정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.[* 게다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[[존 F. 케네디]] 대통령이나 린든 존슨 대통령과 친밀한 사이기기도 했다.] 실제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.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정보제공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. 그리고 이 사건의 교훈은 [[내부고발자]]의 중요성도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것. 또한 이 사건으로 일개 지방 언론사에 불과했던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주류 언론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